Mar 26, 2024
reading Korean book /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01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나에게는 콩팥 하나 정도는 거뜬히 떼어줄 수 있는 오래된 친구가 한 명 있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가족이 몇 명인지, 추석에 어딜 가는지,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도 서로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
소위 베프(Best Friend) 혹은 남자들 사이에선 불알친구라고 불리는 그런 친구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내 친구가 이사를 간다는 소식이었다.
몇 년을 함께한 친구와 떨어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02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금세 다른 친한 친구가 생겼다. 그래도 내 베스트 프렌드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얼굴을 보러 가기에는 먼 거리였다.
예전이라면 이사 간 친구는 잊어버리면 그만이었겠지만, 스마트 시대인 요즘, 우린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서로 다른 환경과 위치에서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핸드폰이 불타도록 열심히 연락을 주고받지만 서로 성격상 귀찮아서 절대 만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욱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03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바로 명찰을 주고받는 일이었다.
명찰을 주고받기 위해 나는 우체국을 찾게 되었고, 그렇게 우체국과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서로의 명찰을 주고받는 일.
학교 친구들이나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 중, 친한 친구들끼리는 명찰을 주고받아 가방에 달고 다니거나 필통에 달고 다녔는데 친한 친구들 중 내 베프가 없을 리가 없지!
명찰을 주고받고 싶긴 한데 버스를 타고 만나러 가기는 싫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택배였다.
04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우체국은 초등학생 때 견학으로 가본 경험과 엄마를 따라서 통장을 개설하기 위해 가본 적 밖에 없다.
우체국과의 첫 만남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
은행도 그렇고 우체국도 그렇고 업무가 5시까지라 학교를 마치고 얼른 뛰어가야 했다.
숨이 찼지만 설렘도 가득 찼다. 초면이지만 구면인 듯했다.
친절하신 직원들 덕분에 금세 포장을 하고, 송장도 써 붙이고,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두근두근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무언가를 보내는 일, 선물하는 일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05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그렇게 접수까지 무사히 마치고 우체국을 나왔다.
택배를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체국을 나왔다. 이틀 후, 메신저로 배송이 완료됐다는 알림이 왔다.
알림이 오자마자 친구에게 받았냐고 물어봤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나에게도 택배가 도착했다.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내 취미는 택배 뜯기이다.
얼마나 자주 인터넷 쇼핑을 하냐면 택배기사 아저씨가 내 이름을 외울 정도이다.
06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택배를 개봉하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하다. 갓난아기가 모유만 먹다가 분유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과 같은 거랄까?
그냥 택배도 이렇게 좋은데 친구가 보낸 택배는 얼마나 좋을까?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상자를 개봉했다.
역시 내 친구! 다른 거 하나 없이 명찰만 달랑 보내줬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무언가를 끼워 보낸 건 아니지만 말이다.
서로의 성격을 잘 아는 터라 더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명찰은 무사히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특별하진 않지만 소중한 선물이었다.
명찰로 끝낼 우리가 아니었다. 그 뒤로 우리는 서로 택배 보내기에 바빴다.
07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그동안 주고받은 것들을 대충 꼽아보자면 서로 지역에 없는 화장품들이라든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 정성을 가득 담아 만든 소원 팔찌 등 여중생들이면 한 번씩 주고 받고 했을 만한 작지만 의미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같이 나누고 선물했을 것들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알기에 택배에 진심을 담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빈 택배 상자와 함께 우정도 쌓아갔다. 매일 같은 지루한 삶을 살고 집에 왔는데 우체통이 차있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택배는 피곤한 시험기간에도 웃음 짓게 해주고 지친 하루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08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열심히 하루를 살고 온 뒤 보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가끔은 깜짝 선물처럼 우체통에 꽂혀있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들로 감동을 주는 택배는 나와 내 친구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정말 소중한 존재이다.
우체통에 꽂혀있는 핸드폰 요금 명세서나 건강검진을 하라는 편지에 속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건, 화가 아니라 웃음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좋은 점만 있을 수가 없다. 택배비는 비싸다.
용돈을 타서 쓰는 일개 학생인 내가 택배를 매일같이 보내다가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릴 걸 알기에 결국 나중에는 택배 대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09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이렇게 택배가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텅 빈 통장도 함께 안겨준다.
나는 매일 택배를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택배를 보내러 우체국까지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난 틈만 나면 우체국에 간다.
“간편한 메신저가 있잖아?”
라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내가 설렌다는데 돈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10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한 메신저나 SNS와 다르게 편지 혹은 택배는 기다리는 맛이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컴퓨터로 전자메일을 주고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어서 메일을 하나 보내고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설렘과 행복을 담고 있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네트워크는 점점 빨라진다. 그 속에서 기다림의 미학은 잊혀가고 있다.
나는 그 기다림을 택배가 대신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쇼핑의 택배에 중독되는 건가 싶다.
지금의 나와 내 친구 사이의 인연은 99.99% 택배가 이뤄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1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무엇보다 설레거든
모두 내 친구처럼 정말 소중한 인생 친구 한 명씩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나를 따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택배가 아니더라도 좋다. 그게 편지라면 더더욱 좋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우체국에 가는 일은 드물고 손으로 글을 써서 편지를 보내는 일은 더 드물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잊히기 전에 만든 특별한 추억 하나는 항상 흘러가는 일상들 사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생각지 못한 상대에게서 온 편지는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오늘은 받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사소한 기쁨을 선물해주는 일은 어떨까?
진정한 우정을 찾길 바라면서 나는 오늘도 택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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