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8, 2022
[글 읽기] "좋은생각"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고맙다는 말 >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고맙다는 말 >
나는 지난 4월에 한국 여자와 호주 남자의 연애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호주 남자와 결혼한 작가가 쓴 연애 소설이기 때문에 많은 독자가 자전 소설이 아니냐고 질문해 왔다.
물론 “아닙니다.”라고 답했지만 사실 소설에는 남편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부분이 여럿 있다.
“’고마워, 유진.’ 데이브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가족 소개해줘서.’ 유진은 데이브의 가족을 처음 만나고 온 날 그가 고맙다고 한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뭐가 고마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진과 데이브》, 현대문학)
소설에서처럼 남편은 내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시댁 식구를 만나고 온 날이면 서투른 한국어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 가족 만났어, 고마워.”
그거야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력한 것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만난 날도, 그러니까 남편에게는 처가 식구들을 만나고 오는 길에도 남편은 고맙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가족을 만났는데 왜 자기가 고맙지?’
집에서라고 다르지 않다. 내가 요리를 할 때는 물론이고, 남편이 요리를 해서 내가 설거지를 해도 남편은 내게 고맙다고 한다. 택배를 받아 놓은 것에 대해서도, 고양이 밥을 준 것에 대해서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내가 청소나 빨래를 하면 매번 말한다.
“와, 엄청 깨끗해, 수고했어. 정말 고마워.”
처음엔 그게 낯설고 불편했다. 남도 아니고 가족끼리 너무 선 긋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도 남편처럼 매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그냥 서로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11년이 흘렀다. 하루도 빠짐없이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서 11년을 보낸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수천 번 듣고 나서야 나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배우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은 없다. 내가 요리를 했다고 배우자가 당연히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청소나 빨래는 물론이고, 택배를 받거나 고양이 밥을 주는 것처럼 아주 작은 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내 가족을 당연히 소개해 주고, 상대의 가족을 당연히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고마워진다.
그 마음을 배운 나는 요즘 남편에게 매일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이, 남편이 나를 위해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아무리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게 한다는 것을 안다.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외로운 친구 >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외로운 친구 >
언니는 내게 가끔 조카를 맡긴다. 초등학생인 첫째 조카의 학부모 참관일이나 체육 대회 날이면 아직 유치원생인 둘째 조카를 우리 집으로 보낸다. 나는 조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목격자이자 조력자였다. 복숭아씨처럼 쪼글쪼글한 조카 얼굴이 사과처럼 말개지고, 애벌레처럼 꼼지락대는 것 외엔 할 줄 몰랐던 손가락이 야무지게 숟가락을 움켜쥐고, 둥근 발바닥에 힘이 붙어 세 걸음 네 걸음을 연이어 걷기까지 나는 그 애들을 계속 지켜봐 왔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조카의 성장이 매일매일 견딜 수 없이 궁금했다.
내가 그림을 그려 주거나 찰흙을 조몰락거려 머리가 큰 토끼 같은 걸 만들어 주면 조카는 잠시 관심을 보이다 금세 질려 했다. 그럼 나는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채소를 안 먹고 편식만 하다가 몸이 작아져 쿠키 통에 빠져 버린 아이 이야기라든가, 북풍을 몰고 온 세계에 겨울을 뿌리러 다니는 북쪽 마녀 이야기 같은 것들. 조카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다 내게 묻곤 했다. 채소를, 꾹 참고 채소를 먹으면 몸이 더 이상 작아지지 않는 거야?
어느 날이었다. 첫째 조카의 편도염이 심해져 응급실에 가느라 둘째 조카가 다급히 우리 집에 왔다. 한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업혀 온 조카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했다.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상황이 그래서였을까. 공룡알 도둑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째서인지 지구에 운석이 떨어지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새까맣고 울퉁불퉁한 운석은 아주 오랫동안 우주를 떠돌고 있었어. 그러다 그만 지구랑 꿍, 하고 부딪혔지.
그렇게 말해 놓고 나는 곧장 후회했다. 이야기의 결말은 ‘공룡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구에 종말이 오고 말았습니다.’밖에 없었으니까. 그때 졸음이 반쯤 내려앉은 목소리로 조카가 말했다.
“운석이가 아주 많이 외로웠구나.”
언니가 종종 쓰는 낮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혼자 노는 건 심심하니까. 운석이는 지구랑 친구하고 싶어서 멀리서 날아온 거야.”
조카의 말에 내가 물었다.
“지구랑 꿍 부딪혔는데?”
“그럼 ‘미안해’ 하면 돼. 꿍 부딪혀서 미안. 그러고 손잡고 같이 놀면 돼.”
그렇구나, 하고 나는 조카를 끌어안았다. 말이 안 된다거나 우주의 법칙은 그런 게 아냐,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로우면 운석이든 사람이든 한 세계를 끝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오롯이 혼자 떠돌아야 한다면, 그렇게 외로운 누군가라면 말이다.
그럼 우리 앞으로 운석이 같은 친구를 만나면 꼭 손잡아 주자. 꿍 부딪혀도 화내지 말고 같이 놀자. 그럼 종말 같은 건 오지 않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조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꿈에서 조카는 커다란 손을 가진 지구가 되어 날아오는 운석을 안아 주고 있을 것 같았다. 외로움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세계를 지키고 있겠지. 나는 역시 조카의 다음 날, 또 다음 날이 궁금해졌다.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재봉 수업 >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재봉 수업 >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문화 센터에 들러 재봉 수업을 신청했다. 결혼과 육아로 청춘은 지나갔고, 어느새 청년과 중년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헛헛함이 몰려왔다. 그간 좋은 아내이자 엄마로 살았으나 거기에 ‘나’는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재봉을 배워 옷을 만들기로 했다.
첫 수업 날, 늘어난 티셔츠와 보풀이 인 레깅스를 벗어 던지고 옷장에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연보라 원피스를 골라 입고 나섰다. 적당한 햇빛과 바람이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는 일이었던가.
경력 20년이라는 선생님의 인사를 시작으로 3개월간 함께할 수강생들의 자기소개를 들었다. 손녀 원피스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60대 여성, 신혼집 커튼을 만들겠다는 젊은 새댁, 이미 고수 느낌이 나는 수강생까지 모두 다양한 이유로 수업을 들으러 왔다.
‘나는 뭐라고 말할까?’ 생각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소개했다. “나만의 멋진 옷을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날은 재료를 직접 준비해 자유롭게 옷을 만들었다. 나는 학창 시절 배운 재봉 실력을 되살려 편히 입을 원피스를 만들기로 했다. 재봉틀에 실을 끼우고, 페달을 지그시 밟자 재봉 바늘이 나의 도전을 응원하듯 막힘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연분홍 리넨 원피스를 완성했다. 선생님이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시원한 원피스도 좋네요.” 하며 보여 주었다. 사람들이 다가와 원피스를 구경하며 말했다. “우아, 예뻐요.” “잠깐 외출할 때 입어도 좋겠어요.”
이제 새로운 사람들과 재봉을 배우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용기 낸 덕분에 숨은 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제자리를 지키는 안간힘 >
“좋은생각” 2022년 8월호
< 제자리를 지키는 안간힘 >
오래된 식당을 ‘노포’라고 부른다. 대대로 내려오는 점포를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50년 이상 된 집을 가리킨다. 3대, 4대를 이어져 오는 노포는 서울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 많다. 물론 다른 지역에도 많다. 요리사 박찬일이 쓴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은 전국 노포를 찾아다니며 그 집의 내력과 솜씨, 장사 철학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박찬일은 노포가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장수하는 비결을 몇 가지로 간추린다. 우선 기본에 충실하다. 재료는 늘 제일 좋은 것을 쓰고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 종로의 해장국집 청진옥은 1937년 창업해 3대째 이어 오고 있다. “불을 끄지 말고 영업하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상을 지내면서도 솥에 해장국을 끓였다고 한다.
대구의 추어탕집인 상주식당은 1957년 창업했다. 이 집은 한겨울에는 문을 닫는다. 추어탕의 주재료인 미꾸라지와 고랭지 배추를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부터 이렇게 해 왔다. 완벽하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 주인의 고집스러운 철학이다. 서울의 냉면집 우래옥은 직원들의 정년이 없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근무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한다. 몇 해 전 퇴임한 김지억 전무는 58년간 근속했다.
직업상 노포에 갈 때가 많다. 출장 가기 전, 인터넷을 통해 출장지에 노포가 있는지 알아보고, 근처에 있으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간다. 냉면이든 자장면이든 국밥이든 돼지갈비든 오랫동안 문을 열고 장사하는 집에서 먹다 보면 일부러 취재하지 않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음식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직원들의 친절한 접객 태도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재빠른 움직임, 잘 닦인 탁자, 언뜻 보아도 청결한 주방 등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기본, 원칙, 고집, 애정 등 우리가 비효율적이라며 무시하고 은근슬쩍 넘겨 버리는 이런 덕목들이 노포에는 고스란히 남아 오히려 ‘브랜드 파워’로 작용하는 것이다.
단골 함흥냉면집이 있다. 노포라고 할 만한 아주 오래된 집이다. 점심을 먹으러 갈 때마다 주인 할머니가 꼭 같은 자리에 앉아 함흥냉면을 먹는 모습을 본다. 아마도 몇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양념의 간은 맞는지, 면발이 질긴 것은 아닌지, 육수는 너무 짜지 않은지, 굳이 맛보지 않고 냄새만 맡아도, 아니 냉면이 담긴 모양만 보아도 할머니는 오늘의 냉면 상태가 훤히 보일 테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은 때가 있었다. 이제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얼마나 애쓰는지 선연하게 보이고, 세월의 거센 흐름 속에서 이 악물고 버텨 내는 안간힘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고통과 유혹과 지루함을 이겨 내고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 시간의 세찬 물살을 악착같이 견디며 서 있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더 필사적이라는 것을 이젠 안다.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자신에 대한 예의 >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자신에 대한 예의 >
“왜 정신 건강 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종종 하는 질문이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서였다. 사춘기를 지나 우울과 불안이 커지면서 나라는 사람이 싫었고 삶은 갈수록 버겁게 느껴졌다. 대학 시절 내내 자기 비난과 자기 학대에 빠져 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까?’
혼자서는 도저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답을 얻고자 정신 건강 의학과 전공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왜 자신을 함부로 대하게 되었는지,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풀어낼 수 있었다.
사실 사람들은 단지 고통이 커서 상담실을 찾는 게 아니다. 그 고통 속에 혼자 있다고 느끼고, 그런 자신을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온다. 이들은 고통받는 자신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고통에 고통을 덧붙이는 데 익숙하다.
심지어 힘든 일이 생기면 정신을 차리라는 미명하에 자기 뺨을 때리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날카로운 것으로 긋는 등 자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친절은 커녕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처음 만난 사람끼리 존댓말을 쓰거나 줄을 서서 순서를 지키는 것 등이다.
가까운 사람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가까워도 해서는 안 될 말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가까운 사람이 아프거나 힘든 일을 겪을 경우 우리는 상대를 걱정하며 친절을 베푼다. 잘해 주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꼴좋다!’라고 비아냥거리거나 ‘이 바보야!’ 하며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이가 많다. 상대의 안부는 궁금해하면서 자신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상대의 감정이나 욕구는 중요하게 여기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상대의 고통은 돌보지만 자신의 고통은 오히려 후벼 파 버린다.
이렇듯 상대에게는 예의 바르지만 자신에게는 무례한 사람이 참 많다. 이들에게 친절은 늘 밖으로 향할 뿐이다. 왜 자신에게 불친절한지 물으면 이들은 이렇게 답한다.
“잘하는 것도, 마음에 드는 점도 없는데 어떻게 친절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이유는 그 사람이 꼭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고, 어떤 일을 잘해서도 아니고, 더 나아가 존경해서도 아니다. 그것이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자기 친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자신이 마음에 들거나 무언가를 잘해서도, 자신을 존경해서도 아니다.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이 세상에 던져져 어떻게든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다.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을 ‘신경증’이라고 진단한다. 아동기에 겪은 부정적 경험 때문에 자신을 탓하는 방어 기제가 비대하게 발달한 것이다. 이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자기 탓을 하도록 습관화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에 무례하게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제라도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정해 보자. 몸이 아프면 잘 챙겨주기, 힘든 일이 찾아오면 자신을 비난하지 않기, “안녕!” 하며 거울 속 나에게 인사하기.
이 세 가지는 내가 가진 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라일락 꽃말 >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라일락 꽃말 >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었던 나는 쉬는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때 단짝이 다가와 어떤 문제의 답을 물어보았다. 나도 처음 보는 문제였다.
“어…… 미안. 나도 모르겠어. 나중에 다시 풀어 볼게.”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했는데 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나중에 듣기로 친구는 ‘수학 시험에서 맨날 100점 받으면서. 나한테 가르쳐 주기 귀찮은가?’라고 생각했단다. 나는 친구가 오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는 내 인사를 무시하고 다가가면 자리를 피해 버렸다. 뭘 잘못했는지 안다면 사과라도 할 텐데 얘기는 커녕 눈 마주치기도 싫어하는 친구에게 서운하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친구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 사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장난치기 바빴다.
엉킨 마음을 풀지 못한 채 몇 주가 지났을까.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가려 가방을 챙기던 나는 문득 마당에 피어난 라일락꽃을 보고 감수성 풍부한 친구를 떠올렸다.
‘걔가 꽃을 참 좋아하는데…… 한송이 꺾어다 줄까?’
나는 마당에서 라일락 한 가지를 꺾었다. 행여 꽃이 떨어질세라 종이봉투에 조심스레 담은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를 찾아갔다.
“자!” 거절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라일락꽃을 건네자 친구는 당황한 눈치였다. “이, 이게 뭐야?” 친구는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라일락꽃을 보니까 네 생각이 나서.”
그날을 계기로 친구는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꽃을 주면서도 이걸로 우리 사이가 예전처럼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는데, 다행히 묵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처음 본 문제를 척척 풀 만큼 천재는 아닌데.’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오해가 풀리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오해가 생겼을 줄이야. 친구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라일락꽃을 줬잖아. 책에서 찾아보니까 라일락에 ‘우정’, ‘소중한 친구’라는 꽃말이 있더라고.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친구를 오해했다니.”
그 상황에서 그저 마당에 핀 꽃을 꺾어 주었을 뿐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도 쭉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요즘도 나는 라일락꽃을 보면 그날이 생각나 슬그머니 웃는다.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그 남자 그 여자 >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그 남자 그 여자 >
그를 처음 만난 건 회사 면접장에서였다. 면접을 보러 간 나는 입구에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면접 보러 왔는데요.”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면접장을 가리켰고, 나는 방향을 잘못 이해해 애먼 곳으로 향했다.
한참 헤매다 뒤돌아보니 그는 거기가 아니라며 피식 웃었다. 순간 어찌나 창피한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면접은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의 비웃음이 자꾸 떠올라 집으로 가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이후 합격 통보를 받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한데 보고 싶지 않은 얼굴과 자꾸 마주쳤다. 그는 나와 같은 부서가 아님에도 업무차 우리 부서에 종종 와야했다.
심지어 집 근처에서도 그를 만났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그 많은 아파트 중에 하필 같은 아파트라니, 어이가 없었다. 출근할 때마다 그와 마주치기 일쑤였다. 일부러 일찍 혹은 늦게 나와봤지만 이상하게 매번 그를 만났다.
한번은 회사에서 산으로 야유회를 갔다. 산을 오른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내 체력은 바닥났다. 특히 휴대폰이며 지갑이며 소지품을 점퍼 주머니에 가득 넣은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점퍼를 벗어 손에 들고 가려는데, 누군가 내 점퍼를 낚아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대신 들어 주겠다면서 내 답도 듣지 않은 채 성큼성큼 앞질러 갔다. 백팩을 메고 있으면서도 세 시간이 넘는 산행 동안 내 점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불편한 산행이 끝나고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길, 그에게 물었다.
“왜 점퍼를 가방에 넣지 않고 계속 들고 있었어요?”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가방에 넣으면 옷이 구겨지잖아요.”
순간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고작 그 이유라니. 나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일을 계기로 그가 점점 궁금해졌다. 처음 본 날에는 얄밉기만 했던 그의 미소가 이제는 예뻐 보였다. 그는 겪을수록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겨우 얄궂은 첫인상 하나로 그를 무시하고 차갑게 대했다니.’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어느덧 부부가 된 지 9년 차다.
내가 물었다. “예전에 우리 왜 그렇게 자주 마주쳤을까?” 그러자 신랑이 답하길, 같이 출근하고 싶어 매일 일찍 나와 근처에서 나를 기다렸단다. 처음 본 날 내게서 빛이 났다고. 하지만 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아 내색하지 않았단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날 그가 내 점퍼를 들어 주지 않았다면? 그의 진짜 모습을 끝내 알지 못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제 그는 나의 소중한 남편이자 아이들 아빠니까.
“그때 내 점퍼 들어 줘서 고마워. 사랑해!”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뜻밖의 응원 >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뜻밖의 응원 >
내가 근무하는 학원도 바이러스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당장 다음 주 수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닥쳤고, 학부모마다 의견이 달라 난감했다. 기나긴 휴업 여파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때 나는 공교육계에 발을 들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네 번째 임용 시험이었다. 1차 시험 합격 발표 날, 지난 시험들처럼 이번에도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을까 봐 엄마에게 이야기하지도 못했는데 다행히 합격이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 것도 잠시, 커트라인을 겨우 넘긴 성적을 보고 불안감이 요동쳤다. 최종 합격은 1차와 2차 점수를 합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2차 시험에서 실수라도 하면 자칫 떨어질 수 있었다.
나는 졸업생이었으나 다행히 학교의 도움을 받아 후배들과 스터디 모임을 꾸렸다. 하지만 내게는 시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먼저 합격한 동기들에게 연락해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한 학번에 학생이 스무 명도 되지 않았으나, 소심하고 인간관계에 서툰 탓에 동기들과 친해지지 못하고 졸업했다. 이후 2년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동기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니, 염치가 없어 낯이 뜨거웠다.
꼬박 하루를 망설이다 용기를 내 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한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 1차 시험 붙은 거 알고 다들 연락 기다리고 있어.”
그 말에 힘을 얻어 다른 동기들에게도 연락했다.
“어제부터 기다렸는데 이제야 연락했단 말이야?”
“합격 축하해! 네가 내 기쁨이다. oo언니한테 연락했어? 연락 안 하면 언니 속상해한다. 꼭 해!”
내 생각과 달리 동기들은 바쁜 와중에도 나를 도와주러 왔다. 방학이 일주일밖에 안 된다고 투덜대면서도 그중 하루를 써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커피와 간식을 사 들고 와서 사기를 북돋아 준 친구도 있었다. 다른 지역에 있어 오기 힘든 친구는 내 수업 시연 영상을 보고 긴 피드백을 적어 보내 주었다. 한 달 내내 메신저 창이 응원으로 가득했다.
대학 생활을 돌이켜 보면 후회만 남았는데, 실은 그 안에 미처 몰랐던 동기들의 애정이 있었다. 동기들의 격려 덕에 시험 준비를 하느라 지치고 불안한 날들을 버틸 수 있었다.
하루는 내가 동기들에게 말했다. 이렇게나 도움을 많이 받는데 보답할 길이 없어 미안하다고. 그러자 한 친구가 얘기했다.
“우리한테 갚을 생각 하지 마. 다음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면 돼.”
그 말을 마음에 품고 시험을 치렀고, 해피 엔딩을 맺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시험 교재를 중고로 내놓았다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내게 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임용 시험이 처음이라 만나서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예전과 달라진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별것 아니지만 도와드리고 싶어요. 수요일은 어떠세요?”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열매산 호랑이 >
“좋은생각” 2022년 9월호
< 열매산 호랑이 >
‘열매산 호랑이’는 올해 83세인 친정아버지의 에스엔에스 닉네임이다. 아버지는 퇴직하고 일주일 뒤에 지역에서 운영하는 센터에 등록해 컴퓨터를 배웠다. 하루는 일하는데 전화가 왔다. 메일을 보냈으니 확인해 보라는 거였다. “사랑하는 마ㄱ내딸. 메일 보내는 ㅇㅕ습 중.” 오타가 섞인 한 줄이 전부였다. 한 자 한 자 자판을 쳤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열매산은 어릴 적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칡넝쿨을 잘라 나무에 걸쳐 놓고 기지를 만들어 총싸움을 했고, 겨울이면 지푸라기를 넣은 포대를 들고 나와 눈이 다 녹을 때까지 썰매를 탔다. 토끼가 나오면 나왔지 호랑이가 나올 산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곳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했다. 그 호랑이의 기백을 닮고 싶다는 의미로 닉네임을 ‘열매산 호랑이’로 지은 것이다.
휴대폰을 개통한 뒤로는 새로운 배움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궁금한 게 있으면 메모해 두었다가 초등학생 막내 조카부터 50대 중반 큰아들에게까지 물어보았다. 막내 조카가 제일 좋은 스승이었다. 뭐든 알 것 같은 할아버지가 문자 메시지 보내기부터 사진 저장, 유튜브 보는 법 따위를 물으니 신이 난 것이다.
반면 다른 자녀들은 “그 연세에 머리 아프게 뭐 하러 이런 걸 배우려고 하세요.” 하며 꼭 한마디씩 했다.
하나 아버지는 손 안의 세상을 접한 뒤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사진을 전송하고 스스로 고속버스 예매도 했다. 그 모습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80이란 나이에는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열매산 호랑이’의 좌우명이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아버지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이끼가 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좋은생각” 2022년 10월호 < 나의 포도알 >
“좋은생각” 2022년 10월호
< 나의 포도알 >
나는 학창 시절부터 뭐든 열심히 했다. 늘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왔고 상도 많이 받았으며 교대에 입학해 임용 시험도 한 번에 통과했다.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육아는 달랐다. 육아 서적도 많이 읽고 종일 부엌에서 반찬을 만들었지만, 첫째에겐 책에서 배운 내용이 통하지 않았고 둘째는 밥을 수시로 뱉었다. 나는 노력해도 성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 육아에 지쳐 갔다.
하루는 저녁도 굶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들에게 소불고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둘째가 또 음식을 뱉어 냈다. 그날따라 겹겹이 쌓인 울분과 서러움이 폭발했다. 나는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는 첫째를 뒤로하고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지? 그저 버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진 않나?’ 갈 곳도 마땅치 않아 아파트 단지 안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아이들 영상을 재생했다. 첫째가 뒤집기를 성공해 놀란 내가 소리 지르는 모습, 둘째가 첫걸음마를 시작해 칭찬해 주는 모습…….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기들이 하는 뒤집기, 걸음마는 귀하게 여기면서 내가 매일 이루어 낸 것들은 왜 가벼이 여겼을까?’
나는 내가 요즘 해내는 일들을 메모장에 찬찬히 써 내려갔다.
“계단 18층을 5분 안에 오름. 돌쟁이 둘째를 업고 첫째 등원 버스를 하루도 놓치지 않음. 일주일에 한번 필라테스. 외출 시 중요한 걸 빠뜨리지 않고 빠르게 짐을 쌈. 한 달에 책 한 권 읽음. 격일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줌. 매일 육아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함.”
내가 이루어 내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말없이 나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평소 첫째가 좋아하는 젤리를 사서 들어갔다. 첫째에게 젤리를 건네며 말했다. “엄마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잠시 나갔다 왔어. 미안해. 다음에는 말하고 다녀올게.”
제법 눈치가 생긴 첫째가 말했다. “엄마, 서아가 밥 안 먹어서 속상했지? 이거 봐. 나는 엄마 기쁘게 해 주려고 호박볶음 다 먹었어. 나 잘했지? 칭찬 포도알 붙여 주세요.”
나는 첫째의 순수한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다음 날 냉장고 칭찬 포도알 판이 하나 추가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했으니까 포도알 한 개, 아이가 양말 신을 때 재촉하지 않고 혼자 신어 볼 기회를 주었으니 또 한 개…… 이렇게 나를 위한 포도알을 채워 나갔다.
나는 전보다 자신감과 여유가 생겼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밝고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내 상황에서 최대한의 성취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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