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4, 2022
"좋은생각" 2022년 5월호
“좋은생각” 2022년 5월호
<소통 부엌>
스무 살에 자취를 하면서 엄마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 곁으로 돌아온 건 재택근무를 하면서부터 였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나는 엄마에게 요리를 배우겠다고 했다. 그렇게 문을 연 요리 교실의 첫 번째 메뉴는 멸치볶음이었다.
“재료는 볶음용 멸치, 마늘, 올리고당, 기름……” “엄마는 왜 결혼했어?”
“가난이 싫었어.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에 빚이 많았거든. 팬에 기름 없이 멸치를 볶아야 해.” “그러면 나 낳은 일 후회한 적 없어?”
“없어. 커 가는 널 보는 게 행복이었거든.” “엄마는 내가 결혼 안 해도 괜찮아?”
“응. 주변에서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근데 해 보는 걸 추천해. 네가 어버이날이라며 카네이션을 들고 온 날, 엄마 힘들다고 대신 바닥 닦아준 날, 그런 소소한 날들이 엄마한테는 큰 기쁨이었어. 네가 그런 기쁨을 놓치지 않고 살았으면 해. 멸치가 노릇하게 구워지면 따로 빼 두고 마늘을 넣어.” “그럼 내가 고등학교 자퇴한다고 했을 때 어땠어?”
“힘들었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까. 그래도 그때 널 말리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아. 하고 싶은 일 빨리 찾았으니 말이야. 잘 적고 있어?” “응.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
일 년간 요리 교실을 핑계 삼아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 이야기, 공부가 하고 싶어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자격증을 딴 이야기, 나를 키우면서 행복하거나 힘들었던 이야기……
전에는 큰일이 있어도 나한테 말하지 않던 엄마가 요즘은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이 요리 교실을 ‘소통 부엌’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부엌에서의 시간이 엄마와 나를 이어주니까. 오늘의 요리는 진미채무침이다.
“좋은생각” 2022년 5월호
<택배 왔습니다!>
명절을 한 주 앞두고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고속 열차 안이었다. 대전을 지날 무렵,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계세요?” “오전에 파마.” “택배 보냈는데, 오후에 도착할 거예요.”
회사 일이 바빠 설 연휴에 시간을 낼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나는 초등학생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과 시댁이 있는 대구에 깜짝 방문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못 오는 줄 아는 식구들을 제대로 놀라게 하고 싶어 아이들과 짠 계획이었다.
동대구역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친정집이 가까워질 즈음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조바심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 택배 왔어요?” “파마 인자 끝났다.” “냉장고에 바로 넣어야 하는 거라 얼른 가셔야 해요.” “먼데 그라노?” “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 “호호, 돈도 없으면서 와 이카노. 내 빨리 갈게.” 엄마는 갈치가 올 거라 추측한 모양이었다. 갈치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이맘때 택배를 보낸 적 있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집으로 향하는 듯했다.
엄마 집에 도착한 나는 아이들과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외쳤다. “택배 왔습니다!” 엄마는 한달음에 문을 열고 나왔다.
“옴마야! 무슨 일이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택배 왔어. 승우랑 승훈이!” “맞다. 우리 손주들이 내가 가장 기다리는 택배지. 무신 이리 반가운 일이 다 있노?”
아이들은 뿌듯해하며 엄마에게 매달렸고, 엄마는 아이들 얼굴을 한참 어루만지다가 뺨을 비볐다. 그간 자주 찾아오지 못한 미안함이 불쑥 차올랐다.
양팔에 손주들을 끼고 아이처럼 좋아한 엄마는 아빠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 퇴근하고 집에 빨리 와요. 당신이 억수로 좋아하는 택배 왔구마!”
“좋은생각” 2022년 5월호
<이 비가 그칠 때까지>
일본에서 파견 근무를 할 때다. 일이 고되고 외로우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달렸다. 한참 가면 종종 들르는 리사이클링 가게가 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귀여운 컵이나, 수첩, 슬리퍼 등을 사며 잔재미와 위안을 느끼곤 했다.
하늘이 흐린 그날도 나는 처진 기분을 달래려 어김없이 그 가게를 찾았다. 소품 몇 가지를 사고 밖으로 나온 순간, 갑자기 강한 바람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는 가게 천막 밑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빗속에 자전거를 타기엔 위험했고, 집까지 걸어가자니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인근에는 불빛 하나 없어 음산하기까지 했다.
그때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나와 내 옆에 서서 한마디 했다. “그것 참 고약한 비네요.”
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설픈 일본어로 물었다. “가게는 몇 시까지 열어 놓으시나요?” 이곳의 불마저 꺼지면 찾아올 어둠과 삭막함이 두려웠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답했다.
“이 비가 그칠 때까지요.”
할아버지는 하늘을 물끄러미 보더니, “언제 그칠지 모르니 들어가서 구경이라도 더 하세요.”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물건을 살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두 시간쯤 지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나서며 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 겁먹은 이방인을 위해 일부러 가게 문을 닫지 않고, 자신의 휴식 시간마저 반납한 할아버지.
지금도 생생하다. “이 비가 그칠 때까지요.”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내 마음에 켜진 환한 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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