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2022년 3월호

“좋은생각” 2022년 3월호 <예쁜 말로 달리는 차> 아빠는 오랫동안 화물차 운전을 했다. 종일 하는 운전이 얼마나 신경을 예민하게 하고, 어깨를 뻣뻣하게 하는지 어릴 때는 몰랐다. 아빠가 운전하면서 인상 한번 찌푸린 적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아 보고서야 누구나 아빠처럼 여유롭게 운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운전이 지겨울 만도 한데, 아빠는 승용차에 온 가족을 태우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다. 문화 유적지나 관광 명소를 지나면 유래와 역사를 설명해주고, 거리의 광고물을 보며 한자나 영어 문제를 내기도 했다. 우리가 학교 생활이나 친구 이야기를 하면 주의 깊게 들으면서 차 앞쪽에 달린 거울로 눈을 맞추곤 했다. “우리 딸은 어쩜 이렇게 말도 재밌게 잘할까.” 하면서. 그 말 덕에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언니의 결혼을 앞둔 추석이었다. 우리 다섯 식구와 내 남편 그리고 예비 형부까지 다 함께 아빠의 고향인 포항으로 친척을 만나러 갔다. 큰 고모부는 고급 양주 서너 병을 선뜻 꺼내 주었다. 아빠는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데다, 9인용 승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운전을 맡기로 했다.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포항에서 친정집인 울산으로 향하는 시각은 깜깜한 밤이었다. 우리는 모두 알딸딸하게 취해 있었다. 아빠가 터널로 진입하는 도로 갓길에 급히 차를 세웠다. “여보, 나 운전 못하겠다.” 조수석에 앉은 엄마에게 건네는 아빠 말에 술기운이 달아났다. 아빠는 차에서 내려 밤공기를 마시며 한참을 서 있었다. 다행히 고속 도로에서도 대리운전 기사를 부를 수 있었다. 아빠는 내 옆에 앉았다. 기침을 자꾸 해서 물을 건넸으나, 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 같았다. 그 무렵 나는 남편과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아빠는 갑자기 여행이 어땠냐고 물었다. 아빠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낀 나는 여행 이야기를 한참 풀어놓았다. 아빠는 “좋은 경험이었네.”하고 작게 대답했다. 우리 가족은 간과하고 있었다. 아빠는 한두 해 전부터 운전이 힘들어진다고 했다. 밤 운전이 어렵고, 특히 터널로 들어갈 때 빨려 드는 것 같다고. 우리가 치료를 권하자 아빠는 되도록 장거리나 밤 운전은 피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무책임하게 아빠가 아픈 걸 잊었다. 아마 좋은 날이니 아빠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을 테다. 나는 그것이 아빠가 여전히 짊어진 가장의 무게라 생각했다. 아빠의 화물차는 아빠가 안아 주지 않으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할 만큼 높았다. 운전석에 기어 올라가 보면 슬리퍼, 안경, 신문, 서류, 간식 등으로 채워진 아빠만의 아지트가 나왔다. 그 공간을 앞으로 얼마나 더 간직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나도 마음이 이렇게 저린데, 아빠는 어떨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빠의 차 안에는 기분 좋은 말이 오가고 까르르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가 운전하는 차에 아빠를 태우고, 예쁜 말로 아빠의 인생을 응원하고 싶다.

“좋은생각” 2022년 3월호 <사람이 하는 일> “우체국 등기를 오늘 12시부터 14시 사이에 배달할 예정입니다.” 어느 여름, 기다린 서류가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육아 휴직 중인 내가 회사 담당자에게 연락해 겨우 받은 서류였기에 마음이 들떴다. 예고된 시각이 지나도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저녁 6시경 등기 배송 상태를 보니, ‘수령 완료’라고 나왔다. 나는 담당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앳된 목소리의 집배원이 전화를 받았다. 사정을 설명하자 집배원은 당황한 듯했다. “아…… 혹시 우편함도 보셨습니까?” “네,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다시 확인해 보고 전화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갓 제대한 듯 깍듯한 집배원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한편으로는 서류가 분실되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결국 그날 집배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 날 점심경,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우체국임을 직감하고 반갑게 받았다. “여보세요?” “네, 등기 우편물 건으로 연락드리는데요. 지금 댁에 계신가요?” 앳된 목소리가 아닌 중후한 목소리였다. 내게 전화한 그는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고개 숙여 사과했다. 나와 통화한 집배원이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어제 저녁 내내 우편물의 행방을 수색했단다. 그날 오간 길을 되짚다가, 우리 아파트 근처 큰길가에 나뒹구는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고. 봉투엔 바퀴 자국이 짙게 남았고 모서리는 찢어졌다. 운송하는 중 오토바이 짐칸에서 빠져 날아간 것 같단다. 입사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수습 직원이 실수를 했다고, 그는 상사로서 대신 사과한다고 덧붙였다. ‘수습 직원’이라는 말에 불만이 가라앉았다. 몇 년 전 내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입사한 지 보름쯤 지났을까. 거래처 한 군데에 물품을 잘못 보냈다. 거래처 사장님의 전화로 실수를 깨닫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연거푸 사과하는 내게, 거래처 사장님은 목소리가 낯설다며 갓 입사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사장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면, 그것도 처음 하는 일이면 그럴 수 있죠.” 너그러이 이해해 준 사장님 덕분에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뒷수습을 할 수 있었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불만을 드러내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쨌든 서류를 무사히 받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아도 집배원은 자책하며 간밤에 잠 못 이뤘을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긴 사이 내 표정이 잠시 굳었는지, 그가 다시 사과했다. “담당자에게 주의를 주고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면 실수할 수 있죠. 담당자분도 이 더위에 우편물 찾느라 고생 많았고, 끝까지 찾아 주어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