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1, 2022
“좋은생각” 2022년 2월호 -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생각” 2022년 2월호 – 함께 산다는 것은
< 정반대의 룸메이트 >
우리 집엔 천생 살림꾼이 한 명 산다. 어차피 씻을 거라며 샤워하기 전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 몸에 물을 묻힌 김에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 걸어 다니는 김에 청소기를 돌리는 사람. 자다 깨서 처음으로 향하는 곳이 화장실이 아닌 싱크대인 사람. 이름 때문에 종종 여자로 오해받는 나의 룸메이트, 기보람 씨다.
“형, 저는 호텔에서 일해야 할까 봐요. 청소하고 깨끗해진 공간을 보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나중에 형이 호텔 하나 차릴 테니까, 같이 일하자!”
함께 살기로 결정한 후 처음 우리 집에 온 보람이는 기겁했다. 호프집에서나 봤을 법한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신발장 앞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쓰레기통을 자주 비울 필요 없이 무한히 넣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보람인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집에서 보게 되다니…… 세상에 이런 집도 있네요.”
그렇게 벌써 5년이 흘렀다. 우리는 많이 다르지만 싸움 한 번 없이 행복하게 지내 왔다. 나는 택배 상자를 풀어 놓기 바쁘고, 그는 청소를 좋아한다. 나는 일회용 젓가락을 종종 사용하고, 그는 일회용품을 이상하리만치 싫어한다. 나는 3분이면 샤워를 끝내지만, 그는 드라마가 반쯤 흘러가서야 샤워를 마친다. 하루는 일어나 보니 화장실이 너무 급했는데 하필 보람이가 한창 샤워 중이었다. 그 영원 같은 10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산다. 성향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생각보다 좋았다. 쇼핑을 좋아하는 나는 그에게 청소용품을 아낌없이 사 주었다. 청소를 편하게 하자며 무선 청소기를 사고, 빨래 너는 수고를 줄이자며 건조기를 주문했다. 그는 최신 총을 보급받은 군인처럼 신이 나서 도구를 휘두르며 청소 실력을 발휘했다. 생필품이 떨어지면 나는 부리나케 주문하고, 그는 그것을 적재적소에 두었다. 우리는 완벽한 짝꿍이었다.
“좋은생각” 2022년 2월호 – 함께 산다는 것은
< 할아버지의 슬리퍼 >
“우당탕탕!”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병동은 순식간에 비상상황이 됐다. 며칠 전에 치매로 입원한 할아버지가 혼자 화장실에 가려다 넘어진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은 어쩌다 몸의 뼈가 부러져 한 달 이상 병상에 눕게 되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두 다리로 일어서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다리가 몸을 지탱하기 벅차 심하게 떨리는데도 몇 번이고 스스로 걸으려 안간힘을 썼다. 치료진이 답답한 마음에 아이를 어르듯 아직 혼자 걷지 말라 이야기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렵게 구한 보행 보조기도 할아버지는 본 둥 만 둥 했다.
할아버지에게 두 다리로 걷기란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하나 우리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과, 눈앞의 문턱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인지 저하를 할아버지의 의지만으로 되돌리기엔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치료진 모두 그저 할아버지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런데 회진 중에 막내 간호사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의 슬리퍼가 좀 작지 않아요?”
모두의 눈길이 할아버지의 발을 향했다. 언뜻 볼 때는 몰랐는데 정말 할아버지 발뒤꿈치가 낡은 슬리퍼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에 쓸리고 있었다. 그날로 우리는 가족들에게 연락해 할아버지의 작은 슬리퍼를 발에 맞는 걸로 바꿔 신겼다.
새로운 슬리퍼를 신은 할아버지는 우리와 양발을 번갈아 뚫어지게 쳐다봤다. 새 신을 신어서인지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좀 더 조심스러웠지만, 비틀거리는 빈도는 예전보다 줄었다.
‘이런!’ 걷기 어렵다고 미리 결론 내린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할아버지가 걷지 못할 의학적 이유는 수십 가지 생각했지만, 정작 할아버지를 걷게 할 사소한 것은 눈앞에서 놓치고 있었다.
소설 <어린 왕자>에는 중절모 그림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바라보는 아이가 나온다. 나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보기만 했는데, 간호사는 그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에서 슬리퍼가 작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걷지 못할 거라 쉬이 단정 지은 나와, 할아버지가 걸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은 막내 간호사의 마음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한동안 천천히 돌던 할아버지는 만족한 듯 새 슬리퍼를 병실 앞에 가지런히 벗어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